신비로운 산
비록 살아본 기억은 그리 없지만 첩첩산골이 고향인지라, 그리고 호남이라 하면 호남평야가 먼저 떠 오르는지라 산다운 산이 있겠냐 하는 것이 호남의 산에 대한 일감이었다. 월출산에 올랐어도 주변에 별로 산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기억도 그 생각에 일조를 하였다.
아래서 본 산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마치 마이산을 험하게 깍아 놓은 듯한 두 봉우리가 기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산이 품고 있는 큰 절 - 역시 이름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 은 경박하지 않았다. 대기업의 편의점은 허락치 않는 상가며, 선유여관이라는 고풍스런 파전집이며 산과 잘 어울리는 듯 하였다.
무엇보다도 숲이 좋았다. 이름은 잘 모르겠으나 남부 지역의 나무들이 한겨울에도 푸르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숲 속에 직박구리들이 한 수천마리는 되는 듯 하였다.
전날 오랫만에 마신 술 때문에 약간 쓰린 속을 커피 한잔으로 달래고 오르기 시작하였다. 점심으로 약과 한봉지와 자유시간 하나를 챙기고.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었는데 잠시 길을 잃고 헤매었다. 두개의 봉우리 중 첫 봉우리 정상에서였다. 분명 저기 보이는 봉우리로 가면 되는데 길이 없었다. 봉우리 사이의 재로 가는 길은 아무리 봐도 그냥 떨어지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떨어지기로 했다. 떨어져도 덜 아파보이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었지만 떨어지면 다발성손상이 넉넉히 예상되는 곳 밖에 없었다. 두륜산 정상은 험해서 혼자가면 위험하다는 K의 말이 생각나기도 하고 고소공포증이 도져오며 다리도 후들거리기 시작하여 포기하고 내려가기로 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옆 봉우리로 가는 길을 찾아내었다. 정상을 짓밟고 다음 정상을 정복하는 구조가 아닌 정상의 여운을 달래고 다음 정상을 기대하는 구조였던 것이다. 짓밟고 짓밟는 자에게는 다발성손상이 따르는 것이었다.
두번째 봉우리에 오르려다 배고픔에 다리가 후들거려 계단에 앉아 약과를 까먹었다. 그것으로 부족해 곤줄박이를 보면 주려고 가지고 다니던 견과 세봉지도 까먹었다. 약과의 당분과 견과류의 지방이 에너지로 준비되는 동안 잠깐 쉬었다가 정상을 향했다. 정상에 오르니 100 명산 정복을 하는 젊은이가 부끄러운듯 후닥닥 그들의 징표를 가방 속에 넣었다. 그 사람이 이번 산행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
다 내려와서 다시한번 뒤를 돌아보게 하는 산이었다. 두륜산이란 이름처럼 머리에 고리를 걸치게 될 뻔도 하였지만 호남의 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좋은 산이었다. 올해 마지막 산의 인상이 내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