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선배는 아랫목에 앉아 선운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선운사와 동백꽃. 여러 갈래의 오름길. 좋다. 20년도 넘은 일이라 짧막 짧막 이미지와 키워드만 떠오른다. 연탄으로 온돌을 뎊히는 방의 노란 비닐 장판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도 떠오른다. Y군과 L군이 같이 있었던것 같고 S군은 역시나 없었던 것 같다.
누가 같이 있었던, 누가 없었던 중요한 것이 아니고, K 선배와 W 선배의 관계도 중요한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제는 선운산이다. 그렇게 찾아가기 어려운 곳도 아닌데 선운산의 존재를 안지 20년이 넘도록 가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K 선배의 말이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나 선운산에 대한 인상은 한마디로 '그냥 동네 산이나 갈걸'. 아기자기 하고 여러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겠다. 특이한 지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인상은 없었다.
산불조심기간이라 많은 등산루트가 막혀 있었다. 길을 따라 한참 가다보면 입산금지를 알리는 현수막이 있는 시스템이었다. 무시하면 옥살이 할 수도 있다는 경고와 함께. 오랫만에 촉새를 보고 좋아하다가 앞길이 막혀 두번이나 돌아왔다. 두번째는 무시하고 가버릴까도 했는데, 궂이 뭐 그렇게까지야 하는 마음에 바른 길로 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마음 잡고 올바르게 살아보려는 나를 절이 가로막았다. 등산로로 가려면 선운사를 거쳐야 하고, 그러려면 3,000원을 지불해야 하였으며, 또 그러러면 50m쯤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백그라운드 뮤직으로 수녀님 밴드의 색소폰 소리가 진동하는 곳에서.
도저히 참아낼 수 없을 것 같아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지도를 보니 길이 있건 없건 야트막한 산 하나만 넘으면 등산로로 접어들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런데 찾아가보니 그곳은 천연기념물 보호지라 함부로 들어가면 진짜 잡아간댄다. 그래도 더 이상은 올바른 길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누가 잡으러 오면 난 아무것도 몰라요, 천연기념물이 뭐예요, 그러면서 선처를 구하리라 생각했다. 택배 트럭에 흠칫 놀라며 빠른 걸음으로 산을 올랐다. 뭔지 모를 천연기념물도 몇 밟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렵게 오르기 시작한 산은 태굴,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정말 동네 산 같았다.
내려오는 길에도 수녀님 밴드는 여전히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르기 전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좀 상기되고 헐떡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4시간 내내 불어재꼈을까?